[고담의 1차대전 뱅기들] 브리스톨 F.2 전투기 (Bristol F.2 Fighter) 1차대전 전투기


개요


맥키버 중위와 파웰 병장의 콤보로 유명한 11 비행중대의 7번기를 묘사한 그림.
(곁에서 날고있는 6번기 조종사의 이름은 찾지 못했습니다.)

1917년 3월 부터 배치된 영국군의 브리스톨 F.2 전투기는, 대전 당시, 연합군과 동맹군 측에서 운용한 2인승 항공기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능을 지녔던 항공기로 평가된다.

빠른 속도와 날쌘 기동력을 지녔던 것은 물론, 뛰어난 상승력과 고속 급강하 능력을 골고루 갖추었던 덕분에 이 2인승 전투기는 공중전 임무에서 1인승 소형 전투기들과 호각을 다툴 정도로 뛰어난 공중전 능력을 겸비했었다. 게다가 커다란 덩치를 활용한 폭장 능력도 좋았기 때문에 근접 항공 지원 임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었고, 각종 정찰 임무 또한 원할히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목적 항공기에 가까운 특출난 성능을 자랑했었다.

브리스톨 전투기를 조종한 많은 조종사들이 에이스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 중에서 22 비행중대의 찰스 조지 개스(Charles George Gass)는 놀랍게도 조종사가 아닌, 관측수로 39대의 독일기를 격추시키는 위업을 이룰 정도였다 보니, 독일군 조종사들은 브리스톨 전투기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숫적 우세 상황이 아니면 되도록 교전을 피하려 했을 정도였다.




성능


- 탑승 인원 : 2명. (조종사와 관측수)

- 최고 속도 : 1,500m 고도에서 198 km/h (123 mph, 107 knot).

- 최대 이륙 중량  :  1,474 kg (3,243 lb)

- 비행 반경 : 593 km (369 mi, 320 nmi)

- 실용 상승 고도 : 5,500 m (18,000 ft)

- 상승 비율 : 4.5 m/s (889 ft/min)

- 무장 : * 1 x 정면으로 발사가 가능한 7.7mm 빅커즈 기관총.
            * 1 or 2 x 후방석에 설치되는 7.7mm 루이스 기관총.
            * 110 kg (240 lb)에 달하는 폭탄.

(275 마력의 롤스-로이스 팔콘 III 수냉식 V12 엔진 기준.)



개발


275 마력의 롤스-로이스 팔콘 III 엔진이 장착된 F.2B 전투기의 전체도.


1차 세계대전이 막 발발한 시점인, 1914년 8월의 영국군 항공 전력은 정말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종류의 항공기를 겨우 겨우 긁어모아서 구성한 7개의 비행 중대가 영국 육군 항공대의 모든 전력이었으며(무장되지 않은 항공기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의 전쟁성은 왕립 항공기 연구소(Royal Aircraft Establishment)에서 설계한 항공기들만을 구입하는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에 그 규모와 질이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군용기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시기였던 만큼 다른 나라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917년이 된 시점에서도, 영국군의 주력 항공기는 전쟁 이전에 개발된 B.E.2 복엽기나, 전쟁이 발발된 당시에 개발된 솝위드 1½ 스트러터와 같은 구식 항공기들이 주를 이루던 상황이어서, 브리스톨 항공사를 비롯한 여러 항공사들은 자체적으로 개발한 항공기를 군에 납품해 보기는 커녕, 전쟁성에서 채택한 항공기들을 대량으로 라이센스 생산하여 군에 납품하고 있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공중전의 비중이 높지 않았던 대전 초창기에는 이렇다할 문제가 없었지만, 기술 발전의 속도는 놀라웠고, 곧 독일군의 신예기인 포커 아인데커 전투기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아인데커 전투기 때문에 공중전으로 발생한 손실이 점점 극심해지자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의 조종사들은 B.E.2 복엽기를 대체할 항공기를 끊임없이 요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에 이기지 못한 전쟁성은 기존의 정책을 바꿔서 왕립 항공기 연구소 외의 항공사에서 개발한 항공기들도 검토해보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이 덕분에 영국의 여러 항공사들은 자체적으로 개발한 군용기들을 군에게 제시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브리스톨 항공사는 잠시 동안 육군 항공대의 조종사로 징집됐었던 프랑크 반웰(Frank Barnwell) 대위가 복무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선임 설계자의 자리에 앉혀서 신형 군용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전쟁 초창기에는 비행 기술을 지녔던 사람들이 군에 동원되곤 했었다.) 반웰 대위는 즉시 프랑스에서 겪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몇몇 항공기들을 제작해냈고 이 중에서 몇몇 기체들을 군에 납품시키기도 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인 평가를 듣지는 못했다.

B.E.2 복엽기를 비롯한 여러 구형 기체들을 완벽히 대체할만한 항공기가 제때 등장하지 않다 보니, 전쟁성은 왕립 항공기 공장(Royal Aircraft Factory)에서 새롭게 제작한 R.E. 시리즈의 복엽기를 B.E.2 복엽기의 후계기로 지정하게되고,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반웰 대위는 R.E. 복엽기와 유사하면서도 결점이 없는 새로운 항공기를 만들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 결과, 반웰 대위는 1916년 3월에 새로운 시제기를 선보였는데, 2인승 항공기인 이 시제기는 R.E. 시리즈의 항공기와 동일하게 관측석이 조종석 뒤쪽에 배치되는 새로운 형태로 제작되었다.(당시에는 무게 중심 등의 이유로 조종석 앞쪽에 관측석이 배치되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었다.) 새로운 시제기에는 120 마력의 비어드 모어 엔진이 장착되었고, 동조 장치로 격발되는 한 정의 루이스 기관총이 기수 우측 세로 뼈대 위에 장착되었다. 이외에도 이중 조종 장치(dual controls)와 함께 라디오, 카메라, 메시지-발사 튜브 등의 여러 장비들이 시제기에 적재되었다.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의 참호전선을 돌파해야하는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항공기의 포격 유도 임무와 사진 촬영 임무의 비중이 엄청나게 중요했었다.)

시제기는 아니지만, 양산기인 F.2B 전투기가 착륙 도중 전복된 사진이며,
동체 아래쪽에있는 검은 구멍이 카메라가 장착되는 곳이다.

시제기의 관측수 좌석은 폴더 형식으로 접을 수 있었고, 교전 상황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카프 링(회전 링 장치)에 부착된 루이스 기관총을 이용해서 다양한 각도로 적기에게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반웰 대위는 후방 사수가 기관총 사격을 자유롭게 퍼부울 수 있도록 동체 후미를 특별하게 설계했는데, 우선 동체의 횡단면이 꼬리날개 쪽으로 이동할 수록 가늘어지게 설계해서 동체에 가려지는 사각을 최소화 시켰으며, 꼬리 쪽에 툭 튀어나와 있는 수직 안정핀이 사격을 방해하는 것도 최소화 시키려고 1/3 이상에 해당하는 수직 안정핀과 방향타를 꼬리 날개 아래로 튀어나오도록 설계하였다. 이 외에도 주익의 윗 날개는 조종사의 시야를 최대한 가리지 않도록 장착하는 등 전체적으로 승무원의 시야 확보에 많은 공을 들여서 설계했다.


점점 가늘어지는 동체와 아랫 면에 튀어나와 있는 수직 안정 핀의 일부분을 묘사한 그림.
(그림 출처)

이렇게 개발된 R.2A 시제기는 반웰 대위가 실전 경험을 통해서 겪은 여러가지 노하우가 많이 적용된 덕분에 상당히 괜찮은 항공기로 태어날 수 있었지만, 항공기의 심장과도 같은 비어드 모어 엔진의 출력이 빈약하다 보니 전체적인 성능은 많이 아쉬운 상태였다.

1916년 5월, 연합군의 항공기들을 일류로 둔갑시켜주게 될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이 개발되자, 곧바로 이 엔진을 장착하기 위해서 기수를 둥글게 변형시킨 R.2B 시제기의 설계안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이스파노-수이자 엔진 만큼이나 잘만들어진 190 마력의 신형 롤스-로이스 엔진이 등장하게 되면서, 이번에는 두 엔진들을 완벽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R.2A기를 전체적으로 재설계하는 작업기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웰 대위는 조종사가 시제기의 주무기인 루이스 기관총을 운용할 때에 애를 먹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기존에 장착되어있던 루이스 기관총은 동체 바깥쪽에 배치되어있다 보니, 조종사가 약실에 걸린 탄알을 제거하기가 여의치 않기도 했었고, 루이스 기관총의 특성상 동조 장치와의 호환성도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기에 이른다.

우선, 루이스 기관총 대신 동조 장치에 적합한 신형 빅커즈 기관총을 사용하기로 했으며, 조종사가 약실에 걸린 기관총 탄알을 손 쉽고도 빠르게 걸러낼 수 있도록, 기관총의 장전 손잡이가 조종석 중앙에 오도록 설계했는데, 이러려면 기관총이 기수 중앙 부분을 관통해야하는 문제가 생겼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엔진 위쪽에 기관총이 들어갈 수 있는 터널을 만들어야 했고, 이 속에 기관총을 넣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다 보니 생산과 정비 시간이 늘어나 버렸지만, 엔진 뒤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듯한 열기 덕분에, 기관총이 얼어 붙는 일 없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가 있어서 오작동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장점이 생겨나기도 했다.


조종석과 엔진실을 관통하는 튜브 안에 설치된 빅커즈 기관총.

후방석 또한 재설계되었다. 기존의 접히는 팁-업 좌석 대신, 레일을 따라 앞 뒤로 움직일 수 있는 슬라이드 방식의 좌석으로 바뀐 덕분에 관측수는 상황에 따라서 조종사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포격 유도 임무를 위한 라디오 운용시 더 나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음은 물론, 위급 상황시에는 즉시 조종사의 어깨를 침으로써 위험을 경고할 수 있었다. (시끄러운 바람 소리와 엔진 소리 때문에 대화만으로는 무슨 말을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려웠었다.)

이 외에도 많은 변경점들이 생겨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부분은 트림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가변 꼬리 날개였다. R.E.8 복엽기에서도 사용된 이 기술은 꼬리 날개의 입사각을 다양한 각도로 변경할 수 있게 해줬는데, 적당히 조절만 해준다면 조종간에 손을 대지 않고도 수평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제기에 있었던 이중 조종 장치는 제거되었지만, 관측수는 작은 비상 레버로 소켓을 연결해서 승강타를 조종할 수 있었고, 방향타 케이블을 조종할 수 있는 손잡이도 있었기 때문에, 조종사가 사망하거나 의식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관측수가 어느정도 기체를 조작해서 최악의 상황을 모면해 볼 수 있었다.

신형 엔진에 대한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 설계된 시제기의 명칭은 정찰기(Reconnaissance)가 아닌, 전투기(Fighter)를 뜻하는 F.2A기로 명명되었다. 이 후 7월 부터 롤스-로이스 엔진과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이 장착된 시제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시제기가 완성되기도 전인 8월에 50여대의 시제기를 생산하는 계약이 맺어졌다고 한다. (당시 영국군은 1인승 전투기를 스카웃(Scout)이라는 명칭으로로 불렀고 2인승 전투기는 파이터(Fighter)로 부르곤 했었다. 이에 반해서 독일과 프랑스는 헌터(hunter)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첫 번째로 제작된 1379기(A3303)는 1916년 9월에 완성되었고, 두 번째 시제기인 1380기(A3304)기는 10월 25일에 완성되었지만, 자신만만했던 설계진들의 예상과는 달리, 첫 번째 시제기인 A3303기로는 6,000피트 이상의 고도에 도달할 수 없다는 후퍼 대위의 평가에 모두들 실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원인 분석 결과, 조종 계통의 삭구(Rigging)는 이상 없었지만 가변 꼬리 날개와 스태거(stagger)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음이 발견되어서 이를 수정한 후 다시 시험 비행을 실시하게 된다. 이번에는 보다 확실한 결과를 얻어 내기 위해서 반웰 대위의 형제이자, 빅커즈사의 선임 실험 조종사인, 헤럴드에게 시험 비행을 부탁했는데, 헤럴드는 분명히 6,000피트 보다 더 높은 고도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다고 느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F.2A 시제기의 고도계는 6,000 피트 근처에서 더이상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퍼 대위의 의견과 동일하게 6,000피트 이상으로는 상승 할 수 없다고 평가하게 된다. 이에 수상함을 느낀 반웰 대위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고도계를 교체시키게 되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15분 만에 6,000 피트 이상으로 상승하는 F.2A 시제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도계로 인한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 발생한 후로는, 9월 21일에 업에이븐에서 공식 시험 비행 평가를 받았고, 여기서 첫 번째 시제기인 A3303기가 상당히 여유로운 성능을 뽐내준 덕분에 군에게 상당히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카울링과 라디에이터가 개수된 후 업에이븐에서 촬영된 A3303기의 사진.

첫 번째 시제기에는 두 개의 분리된 라디에이터들이 주익 바로 앞에 수직으로 양 면에 장착됐었지만, 착륙시 조종사의 시야를 방해했기 때문에, 셔터가 앞쪽에 달려있는 원형의 새로운 라디에이터가 기수 앞에 장착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두 번째 시제기에도 이와 비슷한 라디에이터가 장착됐지만, 셔터가 뒤에 있었다.)

시험 비행 평가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는 즉시 이전에 계약된 50대의 F.2A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두 가지 엔진을 병행해서 생산할 계획이었지만,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은 초기에 여러가지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롤스-로이스 엔진을 사용한 F.2A 시제기를 표준 양산기로 지정해서 생산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필튼에 위치한 브리스톨사의 공장은 이미 계약되어있던 550여대의 B.E.2 복엽기를 생산하느라 여유가 없는 상황이어서 F.2A 전투기의 생산은 점점 지연되었다. 두 달 후인 1916년 12월 20일이나 되어서야 겨우 납품이 가능해지는 바람에 새해가 밝기 전에 6대의 물량을 겨우 겨우 전달할 수 있었고, 나머지 43대의 분량은 1917년 3월 23일 되어서야 모두 전달 될 수 있었다. (F.2A 전투기로 생산된 기종들은 1431~1480(A3305-A3359)기에 해당된다.)

F.2A 전투기가 겨우 겨우 생산되고 있을 동안, 10월 25일에 두 번째 시제기가 완성되었고, 11월에는 A.I.D. 추천에 준거하여 개선된 F.2B 전투기를 200대 이상 생산하는 계약이 맺어졌는데, 아래 날개의 틈을 중앙부로 메우고, 조종사의 시야를 개선시키기 위해서 조종석 앞쪽의 세로 날개 뼈대를 아래로 경사지게 장착하는 등 여러가지 부분이 개수되었다.

F.2B 전투기는 F.2A 전투기 보다 시속 10 마일이나 빨라졌고 고도 10,000 피트 까지 도달하는 시간도 3분이나 단축된 덕분에 이후로는 F.2B 전투기의 모델이 표준 양산기로 채택되었고, 1916년 10월 25일에 완성된, 두 번째 시제기인 A3304기 또한, 중악익과 경사진 세로 날개 뼈대 등의 개조로 F.2B형으로 개수되었다.

1916년 12월 필튼에서 촬영된 두 번째 F.2A 시제기의 사진.

200여대의 F.2B 전투기 계약분 중에서 초기에 생산된 150대의 F.2B 전투기에는 190 마력의 롤스-로이스사 팔콘 1 엔진이 장착되었고, 나머지 50여대에는  팔콘 2 엔진이 장착되었다. 나중에는 275 마력으로 강화된 팔콘 3 엔진이 A7177기에 장착되면서 최고 속도가 시속 198km로 증가된 덕분에, 훗날 양산된 모든 F.2B 전투기에는 엔진 수급이 가능한대로 팔콘 3 엔진이 장착되어서 생산되었다.

200대의 신형 F.2B 전투기들은 4월 13일부터 납품되기 시작했지만, F.2B 전투기로 이루어진 비행 중대가 편제되기도 전에 F.2A 전투기들로 구성된 첫 번째 비행중대가 아라스로 보내졌다. 전선 경험이 있는 조종사들에 의해서 모의전을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실험소로의 납품은 1917년 초부터 시작되었는데, 연구소에서의 긍정적인 보고 덕분에, 1917년에 실시될 예정인 여름 공세를 위해서 두 개의 비행중대들이 형성되고 훈련되기 시작했다.

이 후, F.2A 전투기로 무수한 활약을 해낸 48 비행중대와 11비행중대는 F.2B 전투기가 배치되는대로 우선적으로 지급 받았으며, 이들이 전선에서 이루어낸 무수한 활약 덕분에 7월까지 기존의 계약에 두 배에 달하는 602대의 항공기를 생산하는 계약이 체결된다.

필튼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2269~2518(B1101~B1350)에 해당되는 항공기들이, 1917년 7월 18일 부터 1918년 2월 18일까지 생산되어서 납품되었고, 그동안 브리스링톤에서는 2851~2950(C4801~C4900)에 해당되는 항공기들이 생산되어서 1917년 10월 17일 부터 1918년 3월 2일까지 지속적으로 납품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필튼에 할당 되어있던 B.E.2e 복엽기의 생산이 끝나자, 1917년 7월에 전쟁성은 모든 전투-정찰 비행중대들에게 브리스톨 전투기를 재정비시킬 목적으로 브리스톨 전투기의 대규모 생산을 채택하게 된다. 500대의 2951~3450(C4601~C4800 과 C751~C1050)기들을 생산하는 계약이 9월 4일에 체결되면서 필튼에 위치한 공장은 두 번째 생산 라인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이 기체들은 1917년 11월 30일 부터 1918년 5월 28일까지 항공대에 납품되었다.

이 생산계약은 10월에 더욱 증가되어서 3451~3750(C7801~C8100)기에 해당하는, 300대의 항공기를 두 공장에서 생산해 1918년 3월 29일부터 7월 11일 까지 납품했다.

그러나 브리스톨사의 공장들은 이미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생산 능력의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11월에는 다른 항공 제조업체들과의 거대한 계약을 발주하기에 이른다. 이때 계약을 맺은 회사들은 타인강의 뉴케슬에 위치한 앵거슨 샌더슨사와 암스트롱-위트워스사; 버밍엄에 위치한 오스틴 모터스사와 해리스 & 쉘든사; 첼트넘에 위치한 글로스터셔 항공 회사; 게인즈버러에 위치한 마샬 앤 손즈사; 에인트리에 위치한 제 3 국민 항공 공장(선박 운송 회사인 커나드 라인사에 의해서 관리됨); 그리고 코벤트리의 스탠다드 모터 회사 로써 많은 제조업체이 브리스톨 전투기의 생산에 일조하였다. (각 제조업체들은 동력 장비들을 제외한 100대에서 500대의 동체를 할당 받아서 나누어 생산한 덕분에 약 2,000대의 브리스톨 전투기들이 생산될 수 있었다.)


다양한 엔진들


수많은 항공 제조업체들과 협력해서 생산한 덕분에 브리스톨 전투기는 엄청난 규모로 생산될 수 있었지만, 항공기의 심장과도 같은 엔진은 그러지 못했다.

예정된 생산계획에 비해서 롤스-로이스사가 지닌 팔콘 엔진의 생산량은, 대규모로 생산되는 브리스톨 전투기의 수요량을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첫 대안으로 시제기에서 사용되었던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이 물망에 오르게 되었고, 프랑스 모터 제조업체와 영국의 울슬리 모터스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200마력의 톱니바퀴 버전을 채택해 부족한 엔진 수를 메꾸기로 결정한다.

200 마력의 강력한 출력을 지니긴 했지만,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은 팔콘 III 엔진에 비해서 낮은 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팔콘 엔진이 장착된 브리스톨 전투기는 우선적으로 전투-정찰 비행중대에게 지급하기로 결정되었고,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이 장착된 기체는 군-정찰 부대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해서 브리스톨 전투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브리스톨사의 바람과는 달리 이스파노-수이자 엔진 또한 수량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스위스 설계자인 마크 비르키트(Marc Birkigt)가 개발한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은 우선적으로 프랑스의 스패드 전투기에 주로 탑재되고 있었기 때문에 늘 수량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영국에서 자체적으로 라이센스 생산한 엔진들 또한 로열 에어크래프트 팩토리에서 새롭게 개발된 S.E.5a 전투기에게 우선적으로 탑재되기로 결정났기 때문에, 브리스톨 전투기에게 전달되는 수량은 너무나 적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울슬리에서 라이센스 생산된 이스파노 엔진들은 크랭크 축이 고장 나기까지 평균 4시간이라는 극히 짧은 수명을 지니고 있었고, 브하지에에서 생산된 이스파노 엔진들 또한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엔진 자체의 신뢰성이 너무나 안좋았었다. 메이엔에서 생산된 엔진들이 그나마 믿을만했지만, 아쉽게도 모두 S.E.5a 전투기의 생산에 할당되었기 때문에 브리스톨 전투기는 팔콘 엔진 외에는 믿을만한 엔진을 공급받기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때문에 이번에는 선빔사에서 개발한 200마력의 아랍 엔진을 채택하게 된다.
새롭게 물망에 오른 선빔 아랍 엔진은 300대의 C751~C1050기에게 장착될 예정이었지만, 역시나 완전히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생산된 탓에, 심한 진동이 발생했다고 하며 설치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끝없이 발생했기 때문에, 1917년이 끝나는 날까지, 계약된 1,800대의 선빔 아랍 엔진들 중에서 단 80대만이 겨우 탑재될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시 한 번 더 새로운 엔진을 찾게되는데 이번에는 직접 구동 방식의 대형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에 희망을 걸게 된다. 300마력이라는 어마어마한 출력을 지닌 이 새로운 엔진은 그동안 문제가 속출하던 톱니바퀴를 없애고 직접 구동 방식으로 변경한 덕분에 신뢰성이 어느 정도 개선될 수 있어서 아랍 엔진이 장착될 예정이었던 기체들에게 장착되기로 정해지지만, 크기가 큰 대형 엔진을 장착하기 위해서 동체를 새롭게 개수하는 일이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이마저도 생산이 지연되고 말았다.

두 가지 종류의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을 사용한다는 계획마저 실패하게 되면서, 이번에는 240마력의 시들리 퓨마 엔진이 물망에 오르지만, 이 엔진 또한 설치 과정이 결코 녹록치 않았었다. 6개의 실린더가 수직으로 배치된 시들리 퓨마 엔진을 설치하는 작업은 300마력의 대형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을 장착하는 것 만큼이나 굉장히 어려웠는데, 특히 기수 중앙에 설치된 기관총을 옮기는 과정이 무척이나 어려웠다고 하며, 심지어, 주물 공장에서 발생한 말썽 때문에 납품에 문제가 생기면서 퓨마 엔진을 설치한다는 계획마저 지연되고 만다.

이와 같은 문제들 때문에 R.E.8 복엽기를 브리스톨 전투기로 대체한다는 전쟁성의 계획은 1918년 4월 부터 9월까지 지연되고 말았으며, 납품된 수많은 F.2B 복엽기의 동체들 중에서, 롤스-로이스 엔진이 장착된 기체 외에는 대부분 창고 신세를 면하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노력이 이어진 덕분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는 날, 영국 공군은 롤스로이스 엔진이 장착된 900여대의 브리스톨 전투기와 이외의 여러가지 엔진이 장착된 720대의 브리스톨 전투기를 보유할 수 있었다. (1,349대가 필튼에서 생산되었고 853대는 브리스링톤에서 그리고 1,600대는 다른 계약업체들에서 생산된 상태였지만 엔진 문제로 인해서 모두 사용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1918년 여름이 되어서야 직접 구동 방식의 300마력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이 마침내 완전히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사용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납품이 어렵게 진행됐었다. 그래도 프랑스에 배치된 6개의 비행 중대가 이 엔진이 장착한 브리스톨 전투기를 배정 받았고, 이탈리아에서는 1개의 비행중대가, 팔레스타인에서는 2개의 비행중대가 이 기체를 운용했으며, 5개의 비행중대는 영국 본토 방어 임무를 위해 배치되었다. 아랍 엔진에서 발생한 문제 또한 많이 해소된 후로는 프랑스에 배치된 다섯 개의 장거리 군-정찰 비행대에 배치되어서 운용되었다.

팔콘 엔진의 설치 방식은 다양했지만 오직 자질구레한 세부사항만 있어서 외형적으로 다른 점은 크게 없었고, 다른 엔진이 장착될 때에만 외형적으로 몇몇 부분이 변경되어서 운용되었다. 200마력의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이 장착된 브리스톨 전투기에게는 살짝 높은 원형에 가까운 라디에이터가 사용되었고, 오일 탱크는 카울링 아래 바깥쪽에 장착되는 특징이 있었다.


230마력의 선빔 아랍 엔진이 장착된 브리스톨 전투기의 기수. S.E.5a 전투기와 유사하다.

선빔 아랍 엔진이 장착된 브리스톨 전투기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넓은 면적의 라디에이터를 가졌었지만, 단순한 관 모양의 엔진 지지대가 매우 거칠게 운전되는 엔진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연약하다고 밝혀져서 대체됨과 동시에 사각형 모양의 카울링으로 변경되었다. 이 설치 방식은 S.E.5a 전투기의 라디에이터와 동일했었지만, 300 마력의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을 장착하려면 면적이 더 커져야했기 때문에, 카울링 윗 부분이 높이 올라가면서 펜트-루프 모양으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향상된 지지대와 라디에이터가 선빔 아랍 엔진과300 마력의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에 맞춰 설계되었고, 이 형태는 1918년에 생산된 양산기들의 기본 사양으로 자리 잡았다.


시들리 퓨마 엔진이 장착된 브리스톨 전투기.

퓨마 엔진이 장착된 브리스톨 전투기의 경우에는, 팬버러에서 설계된, D.H.9 복엽기와 비슷한 현수식의 라디에이터가 사용됐었다. 팔콘 엔진의 후기형이 장착된 몇몇 기종들 또한 사각형 모양의 확장된 라디에이터가 사용되었고, 소수의 전투기들에게는 공랭식의 R.A.F.4d 엔진이 장착되었는데, 이 항공기들은 대부분 팬버러에서 실험용으로 사용되었다.

1917년, 미국이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미 육군 항공대가 처음으로 설립되었지만, 마땅한 항공기들이 없는데다가 새로 개발할 시간마저 없었던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항공기들을 주로 사용했었는데, 이 때 영국에서 생산된 방식과 동일하게 브리스톨 전투기를 미국 본토에서 대규모로 생산하는 계약이 이루어졌다. 커티스 항공사와, 뉴욕, 버팔로의 모터 회사에서 2,000대가 발주되었고, 나중에는 오하이오, 데이튼의, 맥쿡 필드에 위치한 항공 생산 국의 기술부에 의해서 감독되는 다른 항공사들을 그룹으로 모아 브리스톨 전투기를 생산했는데, 모든 기체에는, 라이트-마틴사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300 마력의 이스파노 수이자 엔진이 장착되었다.

이 계획안이 브리스톨사로 부터 승인되면서 필튼의 몇몇 직원들이 두 대의 견본 기체들을 지니고 미국으로 건너가 설비를 감독할 예정이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400 마력의 리버티 12 엔진을 탑재하겠다는 의사를 접하고는 당혹감에 빠졌었다.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에 비해서 리버티 12 엔진은 너무 무거웠고 설치에도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에 반웰 대위가 문제를 지적하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커티스사에서 생산한 F.2B 전투기가 첫 비행에서 추락했을 때에야 그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미군은 잘못된 엔진이 사용된 사안을 문책하기는 커녕, 항공기 자체의 결함으로 탓했었던 바람에, 오직 27대의 항공기를 생산하는 계약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나머지 분량은 모두 취소되었다.

하지만 맥쿡 필드에서 수행된 기술 의견은 선입견이 적은 편이어서 필튼에서 제작된 300마력의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이 장착된 P30기와, 290마력의 리버티 8 엔진이 장착된 P37기들이 별다른 문제 없이 첫 비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비록 P37기는 제대로 된 시험을 평가 받기도 전에 추락해버렸지만, 1918년 11월 18일에 슈뢰더 소령이 비행한 P30기는 2,9000피트 (약 8.8km) 상공에 도달하는데 성공하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다. (데이튼에서는 브리스톨 전투기로 세계 고도 기록을 달성했지만 공식적인 승인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비공식 기록으로 남아있다.)

데이-라이튼에서 생산된,  미 육군 항공대 13 비행중대 소속의 XB-1A기.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7월에는, 세미-모노코크 베니어 동체에 이스파노-수이자 엔진이 장착된 F.2B 전투기가 맥쿡 필드에서 제작되었는데, 기존의 명칭 대신, XB-1A(P90)라는 명칭으로, 40대 이상이 데이튼-라이트에서 생산되어서 1920년에 미군에 납품되었다.

브리스톨사와 계약한 외부 업체들은 1918년 11월 26일 부로 브리스톨 전투기의 생산을 중지했지만, 브리스톨사는 초기에 계약한 물량을 전부 전달하기로 결정한 덕분에, 필튼에서는 1919년 9월까지 생산을 지속했는데, 필튼에서는 2,081대를, 브리스링톤에서는 1,045대를, 그리고 외부 거래처들이 1,621대를 생산한 덕분에, 총 4,747대의 브리스톨 전투기가 생산 완료될 수 있었다.



전장에서?



브리스톨 전투기로 구성된 첫 번째 비행중대인 48 비행중대는, F.2A 전투기를 1917년 2월에 수령해서, 3월 8일에 프랑스에 배치되었지만, 예정된 공세 작전에서 독일 공군에게 극적인 기습 효과를 주고 싶었던 지휘부의 결정에 따라 한동안 베일에 싸인 채 전선에서 물러나 있어야했다.

하지만 성능이 뛰어난 신형기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항공대 내에서 돌기 시작하면서, 육군 항공대의 많은 조종사와 관측수들이 브리스톨 전투기를 타고자 48 비행중대로 전출하는 지원서를 쓰기 시작했고, 이들 중에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소지한 베테랑 조종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덕분에 48 비행중대는 곧 영국 최고의 비행사들이 모인 엘리트 비행중대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브리스톨 전투기를 조종해본 조종사들은, 브리스톨 전투기가 독일 공군의 악명 높은 알바트로스 D.III 전투기 보다 성능이 뛰어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이 덕분에 사기가 오른 조종사들은 설사 붉은 남작이 지휘하는 서커스 비행단 소속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예전처럼 무능력하게 격추당할 일은 없을거라 여기며 실전에 투입될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복수의 칼 날을 갈게 된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917년 4월,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합동 공격으로 독일군의 참호 전선을 48시간 내로 돌파한다는 니벨 공세의 계획이 입안됨에 따라, 엄청난 규모의 영국군 항공기들이 육군의 진격을 보조하기 위해서 아라스 근처로 집결되기 시작했으며, 신형 전투기와 함께 노련한 인원들로 구성된 48 비행중대 또한, A. 베레 베팅턴 (A. Vere Bettington) 소령의 지휘하에 아라스 근처로 배치되면서 드디어 첫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니벨 공세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인, 1917년 4월 5일, 빅토리아 십자 훈장의 소지자인 리프 로빈슨 (Leefe Robinson) 대위는 여섯 대의 브리스톨 전투기를 이끌고 아라스 상공으로 날아가 정찰 활동을 벌이던 도중, 리히트호펜이 이끄는 다섯 대의 알바트로스 전투기와 조우하게 되면서 브리스톨 전투기로 첫 실전 전투를 벌이게 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영국 육군 항공대는 알바트로스 전투기에게 대항할 수 있을 만한 1인승 전투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B.E.2 복엽기나 F.E.2 복엽기와 같은 구식 2인승 항공기를 주로 운용하고 있는 처지였었다. 이로 인해서 대다수의 영국군 조종사들은 적기를 편대의 후방으로 유인해서 십자포화를 가하는 전형적인 2인승 항공기의 전투 방식에 익숙한 상황이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항공대에서 가장 기량이 뛰어난 인원들로 구성된 48 비행중대의 조종사들 또한 이와 같은 방어적인 전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였다. 때문에 리프 로빈슨 대위를 비롯한 휘하의 조종사들은 후방사수의 사격각을 확보하기 위한 기동을 시작하면서 곧 십자포화에 걸려들 붉은색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기다리기 시작했지만 붉은 남작의 부하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리히트호펜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들은 공중전의 선구자인 뵐케의 가르침 덕분에 높은 고도에서 빠른 속도로 하강하여 공격한 후, 그대로 이탈하는 일격일탈 방식의 전술에 능숙한 상황이어서 브리스톨 전투기의 후방사수들은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적기들을 공격할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이 결과, 네 대의 브리스톨 전투기가 제대로된 저항을 해보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격추되고 말았다. (생존한 두 대의 브리스톨 전투기들 중에서 한 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겨루 겨우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추락한 두 대의 브리스톨 전투기는 리히트호펜에 의해서 격추당했고, 브리스톨 전투기 편대를 지휘한 리프 로빈슨 대위는 세바스티안 페스트너(Sebastian Festner)에게 격추되는 바람에 전쟁 포로로 붙잡히는 비극을 격게 된다. (리프 로빈슨 대위는 수차례에 걸쳐서 탈출 시도를 감행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휴전협정이 체결 된지 한 달 후인 1918년 12월 31일에 사망하고 만다.)

6일 후에 벌어진 공중전에서도 브리스톨 전투기는 맥을 추지 못했다. 네 대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들에게 공격받은, 네 대의 브리스톨 전투기들이 아무런 손실 없이 두 대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역 격추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이어진 정찰 비행에서 또다시 네 대 이상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들에게 공격 받음으로 인해서 기관총 고장으로 귀환한 단 한 기의 브리스톨 전투기를 빼고는 모두 그 자리에서 격추 당해버렸다.

그리고 4월 16일에는 엘리트 비행중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황당한 사건에 의해서, 몇 없는 브리스톨 전투기를  잃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날 여섯 대 이상의 브리스톨 전투기가 두아이 상공으로 날아가서 반시간 동안 초계비행을 실시했지만 어떠한 적기도 찾지 못했는데, 편대장기가 바람에 떠밀리면서 너무 멀리 날아가는 바람에 적 영공 위에서 다섯 대의 항공기의 연료가 바닥나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한 기를 제외한 모든 기체들이 적진에 불시착하게 되었고, 신형 전투기가 독일군에게 넘어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조종사들과 관측수들은 불시착한 브리스톨 전투기들을 모두 불태워서 파기시켜야만 했다.

전투에 투입된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되던 신형기와, 항공대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원들이 모인 48 비행중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매일같이 쏟아지는 육군의 지원 요청에 항공기를 출격시켜야만 했던 항공대의 입장에서 정말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단 한 번의 출격에서 신형기로 이루어진 편대가 전멸당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브리스톨 전투기 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구형기로 계속 출격해야만 했던 영국 조종사들의 공포감은 극에 달할 정도로 심각해진 탓에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누군가에겐, 기사도 정신이 마지막으로 존재했었던 낭만스러운 공중전이었지만,
대다수의 조종사들은 그런 정신에 대해선 들어보지도 못한 채 죽어갔다.

때문에 공세가 지속되던 1917년 4월 한 달 동안 육군의 진격을 보조하기 위해서 아라스 상공으로 끊임없이 항공기를 띄웠던 육군 항공대는 이 기간을 통틀어 '피의 4월(Bloody april)'이라고 부를 정도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고, 앞으로도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저지할 수 있는 방법과 항공대의 조종사들의 사기를 진작 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어보였다.

하지만 브리스톨 전투기의 장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몇몇 조종사들은 방어적인 성격이 강했던 기존의 2인승 항공기의 전술 대신, 1인승 소형 전투기처럼 운용해보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크고 둔한 2인승 항공기를 빠른 속도와 날렵한 기동력으로 승부를 보는 1인승 전투기처럼 운용한다는 전술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지만, 반웰 대위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브리스톨 전투기는 1인승 소형 항공기와 필적할만한 성능을 지녔었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굉장히 무시무시한 성능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들은 1인승 전투기를 운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기수 정면에 장착된 빅커즈 기관총을 주 공격수단으로 운용하고 관측수의 후방 기관총은 그저 후방을 엄호해주는 역할로 축소했는데, 멈춰있는 표적과 다름없었던 예전과는 달리 굉장히 적극적으로 교전에 임할 수 있게 되면서 방어자가 아닌 공격자의 입장으로 유리한 전투를 치러나갈 수 있게 되었으며, 2인승 항공기다운 튼튼한 내구성과 후방 사수석에 장착된 기관총 덕분에 꼬리를 잡힌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기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어서 생존률이 늘어난 것은 물론 수적으로 불리한 난전 상황에서도 굉장히 강한 면모를 나타낼 수 있었다.

영국 육군 항공대의 인원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있던 4월 30일, 두아이 상공에서 1인승 전투기의 교전 방식으로 교전을 치룬 여섯 대의 F.2A 전투기들이 아무런 손실도 없이 기지로 귀환하면서부터 이 전투 방식의 효용성이 서서히 입증되기 시작했고, 브리스톨 전투기로 구성된 두 번째 비행중대인 11 비행중대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지게 되면서 부터는 이와 같은 전술이 브리스톨 전투기에게 더 알맞다는 것이 확실하게 입증된다.

이제 막 빅커즈 건버스 복엽기에서 브리스톨 전투기로 전환된 11 비행중대는, 니벨 장군의 야심찼던 대규모 공세작전이 실패로 판명되면서 작전이 중단되기 시작한 5월부터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한동안 운 좋게도 별다른 적기의 간섭 없이 사진 정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17년 6월 20일, F.2A 전투기의 조종사인 A. E. 맥키버(Andrew Edward McKeever) 중위와 관측수인 파웰(Leslie Powell) 병장이 탑승한 브리스톨 전투기가 알바트로스 전투기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면서 드디어 이들도 신형기로 첫 교전을 치루게 되었으며, 맥키버 중위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경험을 체험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맥키버 중위는 알바트로스 전투기가 사선 안쪽으로 가깝게 지나가는 순간 짤막한 사격을 가함으로써 적기의 후미를 계속 점할 수 있었는데, 맥키버 중위와 파웰 병장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브리스톨 전투기의 공중전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후로 무시무시한 전적을 쌓아올리기 시작한다. (격추는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맥키버 중위와 파웰 병장은 다음 날부터 이와 같은 교전을 계속 반복 수행함으로써 격추 행진을 이어나갔다. 6월 26일에 두 대의 알바트로스 D.V 전투기를 격추시키면서 첫 격추를 달성한 것을 시작으로, 7월 7일에는 파웰 병장과의 콤비로 세 대 이상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격추시킨 것에 모자라, 9월에는 8대의 적기들과 조우했지만, 되려 그 중 한기를 격추시키고 다섯 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면서 전공 십자훈장을 수여 받게 된다.

10월에는 20대 격추 기록에 달성하면서 전공 십자훈장에 근무 약장 하나를 추가로 수여 받았고, 11월 30일에는 적 진영 내로의 장거리 초계 비행 임무에서 돌아오면서, 7대의 알바트로스 전투기와 두 대의 2인승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지만, 이번에도 맥키버 중위는 역으로 2인승 항공기 하나를 격추시키는데 성공했고 이어진 난전 상황에서 세 대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연속으로 격파시키는 놀라운 전과를 달성하게 된다.

맥키버 중위와 파웰 병장의 교전을 묘사한 그림.

이 전투에서 격추시킨 항공기들 중에서 두 대는 파웰 병장이 사용한 후방 기관총으로 격추시킨 덕분에 이번에는 파웰 중위도 맥키버 중위와 함께 무공 훈장(Distinguished Service Order)을 수여 받을 수 있었다. 맥키버 중위는 종전까지 브리스톨 전투기를 조종하면서 31대의 적기를 격추시킬 수 있었고, 파웰 병장 또한 맥키버 중위의 관측수로 근무하면서 종전까지 19대의 적기를 격추시킨 덕분에 수많은 적기들을 격추시킨 에이스 조종사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맥키버 중위의 놀라운 전투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적기와 적극적으로 교전하기 시작한 브리스톨 전투기는 1인승 항공기와 맞먹는 성능을 바탕으로 당대 최강의 전투기였던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순수 공중전 능력으로 제압해가기 시작했고, 이 덕분에 브리스톨 전투기를 조종한 많은 조종사들이 에이스 조종사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게 되면서 피의 4월에 입었었던 항공대의 괴멸적인 피해를 독일공군에게 되돌려 줄 수 있었다.

이외에도 브리스톨 전투기로 에이스 조종사가 된 사람들의 전투 기록을 살펴보면 굉장히 놀랄만한 전과들이 끊이질 않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이는 에이스는 바로 22 비행중대의 찰스 조지 개스 중위이다. 격추기록만 따져 놓고 본다면 종전까지 39대의 적기를 격추시킨 개스 중위의 전과는, 다른 전설적인 조종사들에 비해서, 그다지 놀라워 보이지 않지만 개스 중위가 유독 눈에 띄이는 이유는 브리스톨 전투기의 조종사가 아닌 관측수로 서부전선의 창공을 누비면서 39대의 적기들을 격추시켰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더 놀라운 점을 이야기 해보자면, 1918년 5월 7일, 에이스 조종사였던 알프레드 앳키(Alfred Atkey)의 요청에 따라 브리스톨 F.2B 전투기의 후방석에 탑승한 개스는 동료 조종사인 존 에버라드 거든(John Everard Gurdon)과 관측수인 존 손튼(John Thornton)이 탑승한 동료기와 함께 아라스 상공으로 날아가 임무를 수행했는데, 운 없게도 20대의 독일군 전투기들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앳키와 개스는 역으로 다섯 대의 적기를 격추시키는데 성공했고, 거든과 손튼 또한 세 대의 적기를 격추시키는데 성공하면서 하루에 다섯 기 격추라는 놀라운 전공을 세움과 동시에, 단 두 대로 20대의 적기를 물리치고 생환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 날 개스와 동료들이 만난 적기의 기종이 단지 ‘D‘라고만 표기되어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기종과 전투를 벌였는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D라는 명칭과 함께 스카웃이라는 표현이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1인승 전투기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조종사의 실력이 공중전의 승패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시기라고는 하지만, 독일의 전설적인 조종사인 베르너 포스 마저도 극한의 기동력을 지닌 포커 삼엽기로 7대의 S.E.5a 전투기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전사한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수많은 에이스 조종사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교전을 치루고 살아남은 조종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적은편인데, 2인승 항공기로 이와 같은 기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전과가 더더욱 놀랍게 받아들여진다.

이틀 후 개스와 앳키는 다시 한 번 더 하루에 다섯 대의 적기를 격추시키는데 성공했고, 이와 같은 교전을 계속 이어 나간 덕분에 개스 중위는 1918년 5월 한 달 동안 28대의 적기를 격추시키는 놀라운 격추 행진을 이어나갔다. (알프레드 앳키는 종전까지 38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는데 이 중에서 13대는 개스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다.) (존 에버라드 거든은 종전까지 28대의 적기를 격추시켰으며, 그가 격추한 적기들 중에는 독일군 최강의 전투기인 포커 D.7 전투기도 여럿 포함되어있다.)

알바트로스 D.V 전투기들을 상대로 교전 중인 브리스톨 전투기.

생환이 불가능해 보이는 20대 2의 불리한 공중전에서도 오히려 적기들을 격추시켰던 개스 중위와 동료들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브리스톨 전투기의 공중전 성능은 믿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적기들을 격추시키는 믿지못할 상황이 자주 발생하게 되자 독일공군의 조종사들은 브리스톨 전투기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이 아니면 되도록 교전을 피했다고 한다.

1인승 항공기에 필적할만한 놀라운 기동력과 튼튼한 내구성, 그리고 후방사수와의 조합으로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던 브리스톨 전투기는 하강성능 또한 뛰어났었기 때문에 높은 고도에서 브리스톨 전투기를 공격한 후 그대로 하강 이탈하는 적기를 쫓아가서 역 격추 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하며, 이어서 강력한 출력을 지닌 팔콘 III 엔진이 장착된 신형기가 등장함에 따라 브리스톨 전투기는 1917년과 1918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2인승 전투기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렇게 전투기로써의 명성을 날리던 브리스톨 전투기는 2인승 항공기가 지닌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서 항공대에서 수행하는 여러가지 종류의 임무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기도 한다.

1918년 3월,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레닌의 소련정권이 독일제국에게 강화를 요청하면서 맺어진 브레스트-리토프 조약 덕분에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묶여있던 모든 병력과 자원을 서부전선으로 집중시킬 수 있게 되면서 총공세를 계획하게 되는데, 이 때 브리스톨 전투기들은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근접항공지원 임무들을 주로 담당했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병력 수송과 식량 등의 문제 때문에 동부전선의 모든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해내진 못했다고 하며, 지속된 전쟁에 사기가 저하된 대부분의 고참 병사들이 서부전선으로 이동되는 과정에서 탈영하는 문제도 컸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저고도로 날아다니면서 보병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퍼붓거나 20 파운드 쿠퍼 폭탄으로 독일군의 포대들을 폭격했고, 112 파운드의 헤일 폭탄으로는 독일군의 공세에 애를 먹고 있던 3군단과 5군단을 지원했었는데, 이 당시의 성과가 꽤 좋았는지, 영국군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브리스톨 전투기를 표준 육군 협동기로 채택해서 운용하게 된다.

본토 방공 임무에서는 요격기로 운용됐는데, 고타 폭격기의 주간 공습으로 인해서 심각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자, 1917년 7월 7일에 독일의 폭격기들을 요격하기 위한 시도가 방공 부대에 의해서 브리스톨 전투기로 처음 이루어졌다. 고타 폭격기를 사전에 요격할 수 있을 정도로 비행반경이 넓고 전투 능력이 탁월한 항공기는 브리스톨 전투기뿐이었던 덕분에, 세 개의 방공 비행중대가 브리스톨 전투기의 후기형으로 재편성되어서 요격임무를 수행했다. 이 항공기들에게는 야간 요격이 용이하도록 45도 각도로 장착된 루이스 기관총이 윗 날개에 장착되었는데, 관측수 또한 스카프 링에 부착된 루이스 기관총을 조작해서 조종사와 같은 각도로 사격했다고 하며, 시속 100마일에서 800야드 거리의 궤적을 남기는 예광탄이 사용되어서 야간 전투 능력을 극대화 시켰다.

39 본토 방공 비행중대의 브리스톨 전투기에 장착된 루이스 기관총들.

롤스-로이스 엔진이 장착된 브리스톨 전투기를 운용한 방공 비행중대들은 어두운 녹색 무광 페인트로 칠해졌고, 계급과 소속을 나타내는 흰색 줄무늬와 원들은 알아보기 힘들게 칠해진 채로 운용되었다.

브리스톨 전투기는 팔레스타인 사막의 건조한 불모지에서도 많은 활약을 이루었었다. 제 68 (호주) 비행중대는 1917년 10월에, 다섯 대의 F.2B 전투기로, 전쟁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적 공군을 상대로 제공권을 차지했다고 하며, 호주 조종사인 로스 스미스 대위와 그의 관측수인 E.A. 무스타 중위는, B1229기로, 전쟁 내내 17대의 적기를 파괴했고 발이 묶인 승무원들과 다른 항공기들을 두 번이나 구해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에서 운용된 브리스톨 전투기는 흰색으로 도장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막의 뜨거운 열기로부터 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빛을 반사시키는 흰색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전쟁이 끝나고 영국 공군이 평시 체제로 들어갔을 때에, 브리스롤 전투기는 표준 육군 협동기(Army Co-operation : 근접 항공 지원)로 채택되었고, 1919년 12월에는 인도와 이라크에서 운용하기 위한 실험을 목적으로, 5893(J6586)기에, 광범위한 사막 장비와 열대 냉각 장치가 장착되었다. 이 실험에서 사용된 실험기와 유사한 214대의 신형, 5894~6107(J6587~J6800)기들이 생산되었고, 이 후 5년 동안 제 21/21 규격에 따라 개수된 총 415대의 항공기들과 함께, 인도 서북 변경주와 파키스탄의 불셔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에 주둔중인 영국 공군의 비행중대로 보내져서, 식민지의 지배권을 유지하는 용도로 운용되었다..

영국 본토에서는 네 개의 육군 협력 비행중대들이 편제되었는데, 이들은 핸든에서 메세지-훅 기술을 연례 행사로 시연한 것으로 유명해졌고, 제 24 (연락) 비행중대와 왕립 비행 연구소에서도 브리스톨 전투기를 운용하였다. 왕립 비행 연구소에서 사용된 기체는 양면이 볼록한 사각형 모양의 금속 날개 팁이 사용되었는데, 날개 앞 전에는 기체 응결 장치가 연결되었으며 증발에 의한냉각 실험에 이용되었다. 개수된 모든 항공기들에게는 새로운 일련 번호가 주어졌지만, 보통 기존의 일련 번호를 지녔었는데, 1925년에 여분으로 생산된 84대의 항공기인, 6721~6804기들은, J7617~J7699기로 명칭이 바뀌었다. (Message-hook : 메세지 픽-업 장치(Message pick-up gear)로도 알려져 있는데 항공기가 이착륙 할 수 없는 지역에서 전언을 주고 받을 때 사용한 기술이다. 착륙 바퀴 쪽에 장착된 갈고리를 이용했었기 때문에 낮은 고도로 접근한 다음, 고리로 낚아채는 방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개수된 기체들 외에도 144대의 항공기들이 1926년에 개수되었는데, 개정된 설계도면으로 특수하게 개수되었고 올드 새럼에 위치한 육군 협력 훈련소에서 철저하게 실험을 받았다. 고하중을 목표로 구조적으로 재설계된 이 기체들은, 브리스톨 96 타입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지만, 공식적으로는 브리스톨 전투기 마크 III로 명명되었고, 1926년 10월 16일 부터 12월 23일 까지, 50대의 7040~7089 (J8242~J8291)기들이 납품되었다.


구조적으로 재설계된 브리스톨 전투기 Mk.III

마지막으로 생산된 물량인 30대의 항공기도 이와 유사하게 만들어졌으나 무장이 제거된 상태로 만들어진 대신 이중 조종 장치가 장착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6988~7017(J8429~J8458)기들은, 1927년 1월부터 6월까지 생산되었는데, 그중에서 J8430기는 특별히 영국 왕세자의 개인용 항공기로써 제작되었다고 하며 24 비행중대가 이 기체를 관리했다고 한다.

3576번째 마지막 새 브리스톨 전투기는 영국 항공성을 위해 제작된 7122기였으며, 1927년 7월에, 훈련용 이중 조종 장치가 장비된 7120기와 함께, 두 대 중 하나의 마크 III 전투기가 뉴질랜드 공군에 전달되었다. 영국 공군의 모든 마크 III 전투기들은 1928년에 마크 IV로 개수되었는데, 총중량이 여전히 높은 상태에서, 동체의 세로 뼈대와 착륙 바퀴가 튼튼해졌고, 핸들리 페이지 오토-슬롯과 거대해진 수직 안정핀 그리고 돌출 균형 방향타가 사용되었다. 마크 IV 시제기인 H1417기에는, 초기에 윗 날개의 사각형 끝 부분에 슬롯-앤드-에일러론 장치가 장착되었다. (Handley Page auto-slots, slot-and-aileron  : 고양력 장치의 일종으로 날개 앞전에 장착되는데 저속에서 실속에 빠지는 일을 상쇄해 준다. 대표적인 예로, 2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주력 전투기인 BF109 전투기의 주익 앞쪽에 장착된 슬랫을 생각하면 된다.)

전체적으로 많은 개수를 받게된 브리스톨 전투기 Mk.IV

브리스톨 전투기 마크 IV는 1928년 7월에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의 비행대로 발행되어서 1914년에 대치되기 전까지 이용되었는데, 소수의 기체들이 민간인들에게 판매되기도 했다. 브리스톨 전투기를 운용한 국가는 많지만 영국 공군 외에는 소수만 운용했는데, 벨기에, 그리스, 맥시코, 노르웨이, 페루, 스페인,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운용했다.

이외에 전쟁 재고품 처리의 일환으로 300마력의 이스파노 수이자 엔진이 장착된 많은 비율의 항공기들이 1920년에서 23년에 판매되었다. 벨기에에서는, S.A.B.C.A.가 라이센스를 얻어서 16기의, 6223~6238기들을 제작했는데, 프리즈 보조 날개와 올레오 착륙 바퀴가 사용되었다. 이와 유사한 12기의, 6510~6521기들은, 1924년 10월과 7일에 스페인으로 납품되었고, 조종면과 올레오 랜딩기어가 수정된 10대 이상의, 7222~7231기들은, 1927년에 멕시코로 보내졌다.

쥬피터 엔진이 장착된 기체를 포함하면 총 5,252 대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브리스톨 전투기가 생산되어서 운용되었지만, 다양한 개수를 통해서 성능을 향상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발전되는 기술 앞에서 브리스톨 전투기는 점점 구형 항공기로 뒤쳐졌기 때문에 곧 많은 수의 항공기들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쥬피터 엔진이 장착된 브리스톨 쥬피터 전투기.
(전투기로서의 성능은 기준이하였기 때문에 훈련용으로 사용되었다.)

브리스톨 전투기들을 마지막으로 운용한 곳은, 뉴질랜드 공군(R.N.A.Z.F.)이었지만 1938년에 남아있는 모든 기체들을 스크랩 처리시키게 된다. 현재 남아있는 브리스톨 전투기는 딱 두 대 뿐인데, E2581기는, 1918년 당시에 칠해진 도색 그대로 런던의 제국 전쟁 박물관에 보존되어있고, D8096기는, 비행 가능한 상태로 베즈의 올드 와든에 있는 셔틀워스 트러스트에 보관되어있다.


--------------------------------------------------------------------------------------------------------------------

중간에 임시 저장 에러로 글이 날아가는 바람에 정신이 완전히 붕괴됐었는데;; 어찌저찌 다시 번역하게 됐네요... orz


플라잉 머신에 올라온 글을 위주로 번역했으며, 이외에도 위키디피아를 포함한 여러 사이트들의 자료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영어실력이 좋지않아 의역이 굉장히 많고, 오역 또한 많기 때문에 너무 신뢰하시진 마시고 그저 재미로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D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강력한 태클 부탁드리며, 혹시나 퍼가실 땐 출처라도 남겨주세요~!!!!




덧글

  • 리뉴얼 중입니다 2013/12/12 17:37 # 답글

    오늘도 많이 알아갑니다~
    라이즈 오브 플라이트도 해봐야 되는데 시간이 없네요...(아효)
  • kodamcity 2013/12/12 20:28 #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ROF는 나중에 천천히 해보세요~ :)
  • 지니 2013/12/13 10:01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 알프레드 앳키는 종전까지 38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는데 이 중에서 13대는 앳키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다 - 이 부분에서 앳키의 도움이 아니라 개스 아닌가요?
  • kodamcity 2013/12/13 14:33 #

    아~ 지적 감사합니다. 개스 맞아요. ㅎㅎㅎ
    몇 일에 걸쳐서 글을 쓰다 보니깐 부분 부분 이상하게 써진 곳이 많았네요. ㅜㅜ

    지니님 덕분에 몇몇 부분을 수정하고 내용도 추가시켰습니다. :)
  • 찌파 2013/12/23 06:18 # 삭제 답글

    덕분에 지겨운 새벽시간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만들어 날려 보고 싶어지네요.
  • kodamcity 2013/12/23 20:28 #

    필력이 부족해서 글 읽기가 굉장히 힘드셨을텐데... 즐겁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T_Tb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