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루크 소위의 이름이 F-22 전투기의 호출명에 사용된 것에 대해서 1차대전 전투기

관측 기구를 격추시키는 프랭크 루크 소위의 항공화.
쉬워 보이는 표적 같아 보이지만, 대공포 사격과 적기의 공격을 뚫고 공격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미공군의 F-22 전투기가 중국의 정찰 풍선을 격추시켰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냥 신기한 일이 벌어졌구나 라고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최근에 기사를 읽다보니 F-22 전투기의 호출명이 1차 세계대전의 에이스 조종사인 프랭크 루크 쥬니어(Frank Luke Jr.) 소위의 이름을 딴 FRANK01FRANK02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프랭크 루크 소위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 관측 기구를 격추시키는 임무에 적극적으로 자원했었고, 이 덕분에 14기의 관측 기구를 격추시키면서 아리조나의 기구 파괴자(Arizona Balloon Buster)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 일화를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풍선 격추 작전에 투입된 F-22 전투기에 프랭크라는 호출명을 지어준 것이라고 추정하더군요.

이 뿐만 아니라, 프랭크 루크 소위가 복무했던 부대는 27 항공 비행대대(27th Aero squadron)였고, 중국 정찰 풍선을 격추시킨 F-22 랩터 전투기의 소속은 100 여년 후의 27 전투 비행대대(27th Fighter squadron) 소속이니 아주 그냥 작정을 하고 풍선 격추 임무에 배정시킨 것 같습니다.

사용 기종도 프랭크 루크 쥬니어 소위는 당시 프랑스 최강의 기체였던 스패드 S.XIII 전투기에 관측 기구 격추용 전용 무장인 11mm 빅커즈 기관총을 장비했었고, 중국의 정찰 풍선을 격추시킨 기종은 현시대 최강의 전투기인 F-22 전투기였으니, 둘 다 기구(풍선) 격추 임무에 첨예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유사성이 조금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점은 약간 억지 같아 보이기도 하네요. 제가 1차 대전 항공기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어떻게든 연관성을 만들게 되는 듯 합니다. ㅎㅎㅎ

아무튼, 미국의 944 전투 비행단에서 프랭크 루크 소위의 이야기를 다룬 짤막한 기사가 있길래 해당 기사 번역문을 올려보기로 합니다. 944 전투 비행단은 미국 애리조나의 루크 비행장에 배치돼있는데 이 비행장의 이름 또한 프랭크 루크 소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기 때문에 관련 기사를 쓴 것 같습니다.

오역 및 의역이 심하니 이 점을 감안해주시고 읽어주세요. :)


프랭크 루크 쥬니어(Frank luke Jr.)

여러 달 동안, 그 무덤의 나무 십자가에는 "신원 미상의 미국인 조종사"라는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무르보(Murvaux) 마을의 프랑스인들은 이 무덤에 묻힌 조종사의 마지막 전투를 목격한 증인들이자, 독일군의 허락하에 미국인 조종사를 매장해준 이들이었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이 무명의 조종사는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다양한 출처로부터 얻어진 여러 증거들이 모이면서 이 이름없는 조종사의 신원이 밝혀졌습니다. 현재 이 조종사의 무덤에는 "27 항공 비행대대, 프랭크 루크 쥬니어 소위, 19기 격추. 1918년 9월 29일 전사."라고 쓰인 묘비명이 세워져있습니다. 이 젊은 소위의 마지막 전투 기록과 세부 사항들이 밝혀지면서 그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이야기로 감탄을 자아냈고, 그의 영웅적인 죽음은 국가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는 데에 아무 이견이 없을 정도입니다.

프랭크 루크 소위의 이야기는 1897년 5월 19일 피닉스(Phoenix)주에서 시작됩니다. 루크 소위는 사막에서 자랐고 학창시절 육상팀의 주장이자 야구팀과 축구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피닉스 고등학교 최고의 운동 선수 중 한명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미국 정부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직후, 20세의 루크는 통신단(Signal Corp) 이병으로 입대했습니다. 그곳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은 루크는 제 1 추격 전대(1st Pursuit Group) 소속, 27 항공 비행대대(27th Aero Squadron)의 신입 조종사로 프랑스 전투에 참전하게 됩니다.

루크 소위의 전투 기록은 겨우 17일에 불과했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14기의 독일군 관측 기구와 4대의 항공기를 격추시키면서, "아리조나의 기구 파괴자(Arizona Balloon Buster)"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루크 소위의 지휘관인 H.E. 하트니(Hartney) 소령은 그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 녀석(boy)처럼 엄청난 배짱을 지닌 이는 없었다. 그는 훌륭한 조종사였고 아마도 서부전선에서 가장 뛰어난 사격술을 지닌 조종사였을 것이다. 우리군은 노련한 조종사들을 지녔었고, 사격 실력이 뛰어난 이들도 많았지만, 노련함과 뛰어난 사격술을 완벽하게 갖춘 조종사는 흔치 않았다. 프랭크 루크는 그런 점에서 완벽한 조종사였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관측 기구(balloon)는 하찮은 존재 같아 보이지만, 1차 세계대전의 참호 전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관측 기구들은 감시 초소로 사용됐으며 양측의 군대가 상대편 전선 후방의 깊은 곳을 살펴 볼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됐습니다.

수소 가스로 가득찬 기구들은 고가의 물건이었고 엄청난 군사적 가치를 지녔었습니다. 이 덕분에 통상적으로 강력한 대공포 포대의 보호를 받았었고, 전투기(pursuit planes) 편대가 근방에 배치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기구를 공격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상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군다나 소구경 납탄으로 수소 가스가 가득찬 풍선을 터뜨리는 일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크 소위는 기구 공격 임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커먼 연기 기둥을 내뿜으면서 떨어지는 불덩이가 격추 기록을 확인하는 데에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루크 소위는 1918년 9월 12일에 첫 번째 기구를 격추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프랭크 루크 소위는 첫 전투에서 포커 전투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친분이 있었던 동료외에는 아무도 격추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격추 기록을 확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관측 기구 격추 임무에 자원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포커 D.VII 전투기와 교전 중인 프랭크 루크 소위의 스패드 S.XIII 전투기

루크 소위의 마지막 전투는 1918년 9월 29일에 벌어졌으며, 적어도 13명의 무르보(Murvaux) 마을의 주민들이 루크 소위의 영광스러운 마지막 전투를 목격했다고 합니다. 이 주민들은 훗날 루크 소위의 마지막 전투에 대한 진술서를 만드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국인 조종사는 독일군 편대의 사격을 받으면서 쫓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하강하면서 지면을 향해 수직으로 강하하더니, 수평 비행으로 전환하면서 독일군 관측 기구가 있는 브리에(Briers) 농장을 향해 날아갔고, 쉴새없이 퍼부어지는 적군의 사격을 뚫고 나아가 관측 기구를 불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지상의 병사들과 독일군 전투기에서 쏟아지는 사격이 계속 지속되는 상황에서 또다른 관측 기구 두 기를 격추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크 소위는 적군의 사격을 완전히 피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적군의 사격으로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루크 소위는 관측 기구 한 기를 더 공격했고 프랑스 주민은 이번에도 관측 기구가 화염에 휩쌓이면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어서 소위는 고도 50 미터 이하로 하강해서 적 병사들에게 사격을 가했고, 그 결과 6명의 병사들이 사망하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병사들이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크 소위의 활약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부상을 입은 데다가 연이은 피격에 피해가 누적된 그의 기체는 결국 루크 소위를 지면에 불시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윽고 독일군 병사들이 그를 포위하자, 루크 소위는 45 구경 권총을 뽑아들었고 가슴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쓰러질 때까지 저항했습니다.(※ 프랭크 루크 소위의 정비병은 루크 소위가 스패드 전투기의 조종석에 권총을 비치하면서 절대 포로로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를 근거로 프랭크 루크 소위는 포로로 잡히는 일을 대단히 죽음보다 더 싫어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국인의 마지막 공격에 격분한 독일군 사령관은 마을 주민들이 루크 소위의 시체를 운반할 때 짐수레에 짚을 넣어서 운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일부 여성들이 루크 소위의 시신에 천을 덮어주려는 행동 또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목격자들은 독일군 사령관이 루크의 시신을 걷어 차면서 "가능한 한 빨리 이것을 치워라"고 쏘아붙였다고 합니다. 소위의 시신은 마을 주민인 Cortlae Delbert와 Voliner Nicolas 두 사람이 시신을 마차에 싣고 묘지로 운구해서 매장했습니다.

겨우 5일만에, 루크 소위는 8기의 관측 기구와 1기의 항공기를 연속으로 격추시키면서 총 9기 격추 기록에 달성했습니다.

전투에서 그가 보여준 용맹스러움은 루크 소위에게 아리조나의 기구 파괴자라는 칭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명예 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루크 소위에게 수여된 훈장은 이외에도 공군 수훈 십자 훈장, 이탈리아 전쟁 십자 훈장(the Italian War Cross), 항공 클럽 용기 훈장(Aero Club Medal for Bravery)이 있었습니다. 1930년, 미국 항공 진흥 협회는 루크 소위를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항공 영웅으로 선정했습니다.

루크 소위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대가족 출신인 덕분에, 피닉스주의 밸리 오브 더 선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루크라는 성씨를 가지고 있다.


※ 프랭크 루크 소위의 전적은 관측 기구 14기, 포커 D.VII 전투기 2기, 할버슈타트 C 정찰기 1기, 하노버 CL 정찰기 1기입니다.

※ 해당 기사에서 서술되지 않았지만, 프랭크 루크 소위는 관측 기구 요격 임무를 수행할 때 자신의 첫 번째 격추를 증언해줬던 프랭크 웨너(Frank Wehner) 중위와 함께 비행을 했습니다. 루크 소위의 윙맨이자 절친인 웨너 중위는 루크 소위가 관측 기구를 공격할 때 상공에서 엄호를 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웨너 중위 또한 5대의 관측 기구와 1대의 포커 D.VII 전투기를 격추시켰습니다. 하지만, 1918년 9월 18일, 루크 소위를 보호하다가 6대의 포커 D.VII 전투기의 공격을 받으면서 격추 당했고, 이 과정에 얻은 부상으로 인하여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 이후에도 프랭크 루크 소위는 동료기들을 대동하고 관측 기구를 요격하는 임무에 자원했지만, 기구 요격 임무의 특성상 동료기들이 계속 격추 당하면서 동료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 하트니 소령의 증언처럼 프랭크 루크 소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작전 중 적군의 공격을 받아서 총알 구멍이 난 상태로 귀환했다는 일화나 적기의 공격을 따돌리고 귀환했다는 일화가 자주 언급됩니다. 심지어 관측 기구를 격추시키고 귀환한 후 적군의 공격으로 손상된 자신의 스패드 전투기 대신 다른 스패드 전투기를 내어 달라고 간청하면서 곧바로 또다른 임무를 수행하려고 하자, 지휘관마저 "자네가 자랑스럽네 프랭크, 하지만 자넨 방금 불가능한 일을 해냈어!"라며 재출격을 막는 일이 있었습니다.

※ 이 외에도 루크 소위는 기지로 귀환하지 않고 프랑스 비행장에서 외박을 보내 출격 금지 명령을 받기도 했고, 출격 금지 명령을 무시하고 혼자서 작전을 수행하러 나가는 등 다소 엇나가는 기질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루크 소위의 마지막 비행 또한 출격 금지 명령을 받은 상태에서 홀로 스패드 전투기를 몰고 이륙한 후 전방의 미국 관측 기구 부대에 "뫼즈 상공에 있는 3개의 독일놈(Hun) 관측 기구를 지켜봐라"라고 적힌 쪽지를 투하하고선 적진으로 날아갔다고 합니다. 몇 분 후 미국 관측 부대는 첫 번째 독일군 관측 기구가 불타면서 추락하는 광경을 목격했지만, 상단에서 발생된 전투로 인하여 그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프랭크 루크 소위의 스패드 S.XIII 전투기의 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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